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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백과사전

윤동주 조선족이라고 우기는 이유는?

by 사전제작자 2022. 2. 23.

서울시 한 마라탕 집 사장이 독립운동가이자 시인 윤동주를 '조선족'이라고 주장해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음식 후기

왜 조선족들은 윤동주 시인을 조선족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요?

정말 윤동주 시인이 그들의 주장대로 조선족이 맞을까요?

윤동주 시인의 생애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 왜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지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윤동주

1)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남학생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조선인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입니다. 직접적인 무장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저항시, 그리고 삶의 고뇌에 대한 시로 일본 유학으로 인해 민족의 걸어가야 하는 길과 다른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이는 자신의 행적을 반성하고 이에 대한 부끄러움을 나타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윤동주를 주로 시로 투쟁한 인물이라고 배우지만 2010년에 세상에 공개된 재판 관련 문서를 살펴보면 놀라운 점이 많습니다. 윤동주는 당시 악명 높았던 특고 앞에서도, 일제 재판관 앞에서도 당당했다고 전해집니다.

부끄러워하던 소극적인 이미지의 시인은 사라지고, 형사 앞에서도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과 대책을 열정적으로 토로하기를 마다하지 않은 저항의 독립투사의 이미지가 선명히 다가옵니다.

윤동주의 판결문에는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구체적인 운동 방침을 논의했다는 사실이 적시돼 있습니다.

2) 생애부터 유소년기까지

남학생들

1917년 12월 30일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현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룽징시 즈신진 밍둥촌)의 유복한 집안에서 개신교 장로이자 소학교 교사인 아버지 윤영석(尹永錫, 1895. 6. 12 ~?)과 어머니 김용(金龍, 1891. 8. 30 ~?) 사이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출생 당시, 위의 손위 누이 둘이 연이어 요절한 후에 태어난 아이라 집안의 기대가 남달랐다고 합니다. 아명은 해처럼 빛나라는 의미인 ‘해환(海煥)’입니다. 동생인 윤일주는 ‘달환(達煥)’, 갓난아기 때 세상을 떠난 동생은 ‘별환’입니다.

명동촌은 윤동주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장소인데, 그 마을의 실질적인 정신적 리더는 목사인 김약연이었습니다. 그는 윤동주의 외삼촌이기도 합니다.

윤동주는 일제에 맞서 저항하기 위해 민족의 지도자를 신앙으로 양육한 외숙부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자랐습니다. 항일과 통일 운동으로 유명한 민족주의자 문익환 목사도 바로 이 명동촌 출신이며, 윤동주와 함께 자랐습니다. 참고로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안중근 의사도 거사 전 이 명동촌에서 사격 연습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명동촌 사람들은 항일 감정으로 인해 일본을 일본이라 부르지 않고 왈본이라고 부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때문인지 윤동주는 18살인 1935년 평양에서도 일본 순사들 멱살 잡기가 연일 화제였던 숭실학교로 건너왔으나 일제가 신사 참배운동을 강요하자 문익환 등과 함께 동맹 자퇴를 감행합니다.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 의지를 자퇴함으로써 드러낸 것입니다.

유소년 시절 대부분을 만주에서 보냈으나 그의 시에 등장하는 만주는, 머나먼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쓸쓸한' 곳이거나 혹은 '돈 벌러 가는' 곳이었습니다.

3) 체포와 사망
1943년 7월 10일, 함께 교토에서 조선인 유학생으로 지낸 고종사촌 송몽규가 '재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으로 특별 고등경찰에게 체포되어 시모카모 경찰서로 압송됐고, 사흘 뒤 윤동주 자신도 고희욱과 함께 고오로기 사다오(興梠定) 형사에게 체포되어 취조를 받고 12월에 송몽규, 고희욱과 함께 검찰국으로 넘겨졌다가 1944년 3월 31일 교토 지방재판소 제2형사부에서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로 수감되었습니다.

약 1년 7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견뎌오던 윤동주는 건강악화로 인해 1945년 2월 16일, 향년 27세의 나이에 규슈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뇌졸중으로 요절하였습니다. 불과 광복 6개월 전의 일이었습니다.

윤동주의 묘소는 윤동주가 태어난 북간도에 있는데, 윤동주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해방이 되고 관동군이 무너지고 소련군이 쳐들어오고 만주가 공산화되는 현실 속에서 윤동주의 가족과 친인척들은 모두 북간도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40년 넘게 북간도에 방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족이 윤동주를 조선족이라고 주장하는 이유

묘지

중국과 조선족들이 윤동주를 조선족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크게 2가지입니다.

첫 째는 윤동주가 태어난 곳이 중국의 길림성이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윤동주의 묘소가 중국 북간도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태어나고 묻혀있는 곳이 중국이고 조선족 자치지구이니 조선족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중국의 동북공정 정책과 함께 맞물려 조선족들 사이에서 주장되고 있는 이유가 되겠습니다.

 

정말 조선족일까?

우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윤동주가 중국 길림성에서 태어나긴 하였으나 당시 일제 강점기 시절에 피난으로 인해서 명동촌으로 옮긴 상태에서 태어난 것뿐이지 국적을 옮긴 것이 아닙니다. 윤동주 부친의 고향은 함경북도로 엄연한 조선 사람인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명백한 증거는 현재 한국에 살고 있는 그의 친척들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유명한 가수인 윤형주 씨가 대표적이며 해방된 이후 북간도에서 대부분 한국으로 넘어와 생계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조선족이라는 단어 자체가 윤동주가 사망 당시까지에도 없었던 단어입니다.

일제 치하에 중국 쪽으로 넘어간 조선의 인구만 대략 20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당시만 해도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던 조선인임을 자처하던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본인을 중국인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러한 명칭이 생긴 것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 이후에 55개의 민족을 소수민족으로 명칭 하면서부터 생긴 것이기 때문에 조선족이라는 말은 상황상 이치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더불어 태어난 곳이 국적이 아닌 혈통을 국적으로 취급하는 중국의 전통상 더더욱 윤동주는 중국인인 조선족이 아니며 한평생 나라 독립을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분이 중국인이라는 것은 어불성설 그 자체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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