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안타깝게 고인이 된 대한민국의 MC인 허참 씨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허참의 생애
허참은 어렸을 때부터 라디오 드라마에 심취하여 성우 흉내로 사람들을 웃기는 데 능했고, 학창 시절 다니던 웅변학원에서 발음법과 발성법, 화술을 배우면서 우렁차고 또렷한 목소리와 재치 있는 말솜씨를 갖게 되었습니다.
1970년 영남상고를 졸업하고 바로 군대에 입대한 허참은 이등병 때부터 부대 웅변대회에서 1등을 따는 등 두각을 나타내며 문화선전대 진행요원으로 뽑혔고 군 생활 내내 위문공연 MC로 활동했습니다.
1973년 전역 후 방송인이 되고 싶어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허참은 처음엔 군대나 고향 친구 집을 떠돌면서 생활 하다가 중구 정동에 있는 문화방송(MBC) 근처에서 구멍가게를 하던 친구 집에 더부살이로 정착하여 채소나 생선 배달 등 잡일로 생계를 꾸리며 방송국 부근에서 계속 꿈을 키워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군대 친구와 종로에 놀러간 허참은 당시 이종환이 운영하던 통기타 라이브 클럽 쉘부르에 들렀다가 통기타 그룹 쉐그린 공연 후 행운권 추첨에 당첨되어 무대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문선대 MC 3년 경력을 살려 전혀 떨지 않고 오히려 뻔뻔하게 보일 정도로 입담을 과시하여 무대의 가수들과 관객들을 배꼽 잡게 만들었습니다.
허참의 말솜씨에 감탄한 쉐그린 멤버가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라고 묻자 허참은 "아... 기억이 안 납니다" 라며 능청을 떨었고, "허 참, 자기 이름도 기억 못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라는 면박에 재치 있게 "아 그래요, 제 이름이 바로 허참입니다"라고 받아치면서 클럽 안의 사람들을 전부 빵 터뜨렸습니다. 이것이 부산 청년 이상룡이 허참이란 예명을 쓰게 된 계기가 된 것입니다.
허참의 재능을 알아본 이종환은 그를 쉘부르의 MC 겸 DJ로 채용하여 그의 명성은 높아졌고 나중엔 허참 쇼 라는 자신만의 쇼를 열어 매번 쉘부르 입장권이 동날 정도로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결국 1974년, 쉘부르의 손님으로 그를 지켜보던 당시 MBC PD 겸 DJ 박원웅이 허참을 새 라디오 프로그램 청춘은 즐거워 MC로 영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방송계에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MBC 라디오의 MC와 DJ로 활약하던 허참은 1976년 경 MBC 내 모든 프로그램의 사회자를 아나운서로 교체한다는 방침으로 일자리를 잃고 신발 장사를 하는 등 잠시 방송계를 떠났다가 TBC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이적하여 7대 가수쇼 MC로 TV 무대에 진출했고, 그 이듬해인 1977년부터 TBC의 간판 쇼 프로 쇼쇼쇼의 MC를 맡으며 명실상부 당대 최고의 MC로 떠오르게 됩니다.
허참과 가족오락관
허참하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떠올리는 프로그램은 가족오락관을 꼽을 수 있습니다. 또 반대로 가족오락 관하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떠올리는 MC는 허참입니다.
그만큼 그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가족오락관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1984년 제1회 방송부터 2009년 마지막 방송까지 KBS 가족오락관의 MC를 맡게 되었으며 국민적 사랑을 받는 예능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진행자인 허참 역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한때 시청률이 35%를 넘는 경우도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교통사고로 인해서 한 번 펑크를 낸 적이 있었지만 여성 MC가 스무 명이 넘게(21명) 바뀔 동안 허참만은 자리를 굳건히 지키면서 프로그램의 마스코트 격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뒤 가족오락관이 2009년 4월 부로 25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질 때, 30대에 진행을 맡아서 60대에 마무리하게 된 그는 "마지막 녹화를 끝내고 나서, 한 주부 방청객이 '아저씨 잘 가요'라고 인사하는데 마치 은퇴하는 기분이었다"며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그의 가족오락관 25년 진행은 2019년 11월 전까지 국내 단일프로 최장수 연속 진행 MC 기록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 기록의 최고 경쟁상대인 '일요일의 국민MC'로 유명한 전국 노래자랑의 송해는 1988년 5월부터 1994년 5월까지 전국 노래자랑을 진행했고, 잠시 하차했다가 동년 10월 16일에 복귀했습니다. 그러므로 1994년 10월 16일부터 연속 진행 기록을 계산하면 2019년 11월을 넘겨야 허참의 기록을 뛰어넘게 되는데 마침내 송해가 그 기록을 뛰어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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